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활동소식] 2026 ‘참전군인을 만나러 갑니다’ 세미나 두 번째 모임

안녕하세요! 희경입니다 :)

4월 8일 수요일 저녁, 온라인 회의를 통해 ‘베트남전쟁과 한국사회’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이날 모임에는 지원님, 우현님, 여진님, 연호님, 미화님, 유진님, 소연님, 병진님, 청솔님 총 열 분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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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 나누기

모임의 첫 순서로 베트남전쟁과 관련해 각자 읽은 논문과 시청한 다큐멘터리에 대한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가장 먼저 지원님은 강유인화의 논문 「한국사회의 베트남전쟁 기억과 참전군인의 기억투쟁」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터닝포인트: 베트남전쟁 5부작>을 보고, 한국과 미국 참전군인들의 기억 투쟁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짚어주셨습니다. 미국 참전군인들이 반전 운동이라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던 반면, 한국은 그러한 토양이 부족해 참전군인들이 스스로를 치유하고 정체성을 재구성할 기회가 적었다는 점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이에 우현님은 윤충로의 「한국 베트남 전쟁 기념과 기억의 정치」을 읽고 오랜 기간 장교로 복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가 내세우는 서사와 참전군인들의 생태가 다를 것이라는 시각을 보태주셨습니다.

연호님은 윤재현의 「고엽제에 노출된 월남전 참전군인의 삶의 재편성」 논문 속 인터뷰를 읽고, 가난 속에서 가족의 생계를 지키기 위해 타국으로 향해야 했던 그 시절 청년들의 사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참전군인들이 정글에서 생활할 때, 하늘에서 뿌리는 고엽제를 벌레를 쫒는 소독약으로 알고 옷을 벗고 맞았다는 인터뷰 내용이 충격적이라고 말씀주셨어요. 유진님은 최정기의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공식적인 기억과 대항기억의 차이를 중심으로」를 읽고 워싱턴 DC에 가셨을 때 베트남전쟁 기념 공원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는 인상 깊은 경험을 들려주셨어요. 미국과 한국이 베트남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짚어주시며, 베트남 현지에 있는 증오비와 위령비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셨어요. 여진님도 지원님과 같은 논문을 읽고 일전의 참전군인과의 만남을 통해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자부심 이면에 ‘누군가 내 고생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인정 욕구를 엿보셨다고 해요. 일상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할아버지들이 바다 건너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생생한 증오와 학살의 주체라는 사실에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는 진솔한 생각을 밝혀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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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이어진 순서에서는 미화님의 발제로 본격적인 세미나가 진행되었습니다. 세미나는 전쟁의 기억이 국가에 의해 단일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짚어보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용산 전쟁기념관 해외파병실에 전시된 안보와 경제 중심의 공식 서사가 ‘국가’의 기억이라면, 호치민 전쟁증적박물관에서는 이 전쟁을 미국에 대항해 싸운 항미 전쟁으로 기억하는 것은 ‘베트남’의 기억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한국전쟁을 다르게 명명(남한은 ‘6.25 전쟁’, 북한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하듯 말이죠. 이 거대한 서사들 사이에서 밀려나 있는 참전군인 개개인의 파편화된 경험들이 바로 ‘개인’의 기억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국가 안보와 경제 발전 논리에 묻혀 있던 참전군인의 피해와 민간인 학살 문제는 사회・정치적 지형이 바뀐 1990년대에 이르러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세계적인 탈냉전의 흐름과 한국 사회 내부의 민주화 운동, 그리고 결정적으로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를 기점으로 양국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그동안 배제되었던 고엽제 피해와 민간인 학살 문제 등 전쟁의 이면을 마주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던 과정을 살펴주셨습니다.

본격적인 전쟁의 양상을 살피기 앞서, 이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한국은 왜 그토록 깊이 개입하게 되었는지를 짚어보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베트남은 1945년 해방 후 다시 프랑스와 8년에 걸쳐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식민 지배의 사슬을 끊어내는 듯했지만, 이어진 제네바 협정으로 인해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국토가 분단되게 됩니다. 당초 약속되었던 남북 총선거마저 무산된 가운데,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친미 정권을 세워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964년, 미국은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을 무력 침공하며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훗날 미 국방장관 맥나마라의 회고록을 통해 이 통킹만 사건이 미국의 무력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한 자작극이었음이 밝혀졌죠.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이를 국제전으로 포장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 참전을 요구했습니다. 태국과 호주, 뉴질랜드의 참전 규모는 한국의 10분의 1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한국은 장장 8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무려 32만 명에 달하는 대대적인 전투 병력을 파병하여 이 전쟁에 뛰어들게 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베트남전쟁은 뚜렷한 전선이 없는 ‘게릴라전’의 양상을 띄고 있었습니다. 명확한 전선이 존재하지 않았고, 마을 주민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뒤섞여 있었죠. ‘전과’란 사살한 적의 수와 노획한 무기로 측정하였고 이러한 전쟁의 특성이 광범위한 민간인의 죽음을 초래하거나 피해를 묵인하는 구조가 되었음을 깊이 있게 다뤄주셨습니다. 

한국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당시 박정희 정권에게 베트남 파병은 5・16 군사정변과 1963년 한일협정 반대 시위 등으로 촉발된 정권의 정통성 위기를 돌파할 카드가 되었습니다. 파병의 대가로 미국의 전폭적인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아 자본주의 진영의 ‘쇼윈도 국가’로 성장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시대에 청년시기를 보낸 1945년 전후 출생한 이들에게 참전이란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들의 전쟁동원 배경에는 전후 복구 시기였던 1960년대 한국 사회에서 지독한 가난과 배고픔을 벗어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혹은 군 내부의 강도 높은 훈련과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전선으로 향해야 했던 비자발적인 동기가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전 이후 경제 발전과 반공 이데올로기로 치환된 전쟁 기억 속에 참전군인 개개인의 경험은 국가 서사 속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반전 여론이 들끓던 1968년 당시, 신문과 텔레비젼 등의 미디어를 통해 미군의 미라이 학살이 알려지면서 전세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기 한국은 1・21 사태를 겪으며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은 군 복무 기간을 30개월에서 36개월로 연장했고, 징병률을 높이고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주민등록제도’를 도입하는 등 병영 국가로서 제도를 확고히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베트남전쟁은 남과 북의 대리전 성격도 띄었습니다. 남한이 남베트남과 미국을 도와 대규모 군대를 파병한 것과 달리 북한은 북베트남에 공군과 군사고문단을 파견합니다. 베트남전쟁이 남긴 상처는 깊었고, 그것을 마주하는 방식은 국가마다 달랐습니다. 미국에서는 귀환 병사들이 겪는 여러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했고 그들이 겪는 문제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임이 밝혀지며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컸습니다. 반면 한국에서 베트남전쟁은 경제 성장 뒤편으로 밀려난 잊혀진 전쟁이었고, 참전군인들 역시 잊힌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침묵은 1990년 월간 ⟪말⟫지가 퀘이커교도인 존슨 부부 보고서 일부를 보도하며 비로소 깨지기 시작합니다. 1992년에는 고엽제 피해 보상을 외치며 참전군인들이 경부고속도로를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1999년 ⟪한겨례21⟫을 통해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가 보도되며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이 전개되었고, 시민들의 성금으로 베트남 푸옌성에 한베평화공원이 만들어졌습니다. 2000년 당시 분노한 참전군인들이 한겨레신문사에서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이는 등의 ‘기억 투쟁’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후로 오랜 시간을 건너와 2015년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최초로 방한하며 다시 전쟁의 기억을 불러왔고, 시민평화법정을 거쳐 베트남 피해자 응우옌티탄(퐁니마을)이 한국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cd8836a943d07.png

강연의 마지막은 강원도 화천군 오음리에 대해 다뤄주셨습니다. 오음리 일대는 과거 참전군인들이 파병 전에 실전 훈련을 받았던 곳입니다. 참전군인의 말에 의하면 지금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지만 당시 그곳에는 사창가가 밀집해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기념관과 공원이 들어선 ‘월남 파병용사 만남의 장(베트남 참전 기념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적을 향해 총을 겨누던 군인 조형물이 철거되는 등 이 공간에 대한 논란이 몇 차례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국가의 공식 서사에서 누락되고 학살의 가해자라는 정체성에 직면한 참전군인들이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자부심을 확인하는 기억 투쟁의 장소가 오음리 공간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이날 세미나는 예정된 시간을 꽉 채울 만큼 열띤 분위기 속에서 깊이 있는 내용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미처 다 다루지 못한 이야기와 본격적인 구술 활동에 필요한 내용은 다음 세미나로 미루어 계속 이어가기로 했어요. 앞으로의 활동을 통해 우리 안에 어떤 질문과 생각들이 모이게 될지 더욱 기대가 되는 시간이었어요. 그럼, 다음 세미나에서 만나요! 👋


정리, 글 지희경